[일흔번째 리뷰] 이영도 - 드래곤 라자 리뷰
그 먼 옛날 천상의 과수원에 최초의 감이 열린 이래 이영도 작가님의 첫 통신연재 소설,
드래곤 라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그 후속작들 또는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떨어지지만
이때의 이 유쾌한 감성과 인간미는 다시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첫번째 작품인데 이때부터 이미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 조형은 완벽했고
특히 드래곤과 여러 여캐들은 이 이후 한국판타지의 스테레오타입을 정립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과 같은 종족 차원에서의 고찰은 다른 소설에서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 후치는 소꿉친구 제미니와 약혼한 사이로 17살의 초장이 후보이다.
숲속에 은거한 칼이란 중년과 친하고, 우연히 마을에 들린 타이번이라는
장님 마법사의 조수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헬턴트 영지의 특성이 많이 강조되는데,
아무르타트는 헬턴트 영지 가까운 곳에 몇백년 동안 자리 잡은 용으로
드래곤은 몬스터를 대량으로 부리기에 헬턴트 영지는 언제나 죽음과 가장 가까운 영지였다.
그렇다보니 여기서 100번에 가까운 전투를 치른 샌슨과 17살까지 생활한 후치는
다른 사람들과는 마인드도 신체능력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아무르타트를 토벌하기 위해 수도에서 캇셀프라임과 그 드래곤 라자, 디트리히 할슈타일을
파견하였으나 이들마저 패배하고 죽어버려 헬턴트 전 영주의 사생아로 은거생활을 하던
칼 헬턴트, 경비대장 샌슨, 후치 이 셋은 아무르타트가 요구한 인질들의 몸값을 마련하고
왕의 드래곤의 죽음을 보고하기 위해 수도로 향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이야기 중에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들은 전형적인데, 이 캐릭터들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유력한 왕권 후보였으나 이를 버리고 방랑하는 왕자 길시언, 본성은 착하지만 사연이 있는 도둑 네리아,
자연을 사랑하고 뭔가 마이페이스인 아름다운 엘프 이루릴,
호탕하고 불같은 성질을 가진 체면에 구애받지 않는 높은 신분의 드워프 엑셀핸드 등.
물론 반지의 제왕이나 D&D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지만 한국 판타지 소설 중
이 소설의 영향을 안받은 작품은 없을 것이다.
이 이후의 전개는 전형적인 에피소드 활극이다.
전체적으로는 바이서스의 초대왕 루트에리노와 그 옆의 유일무이한 인간 9서클 마스터 핸드레이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과정에 바이서스와 전쟁 중인 자이펀의 신병기와 얽히고
바이서스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를 불태울 수 있는 크라드메서의 비밀도 알게 되는 식이다.
이 모든 스토리라인이 결국 마지막 에피소드에 맞물리는데
중학생 때 읽은 이 스토리의 반전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이 소설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300년에 걸친 핸드레이크의 장대한 실패기라 하겠다.
사실 이 소설의 진주인공은 핸드레이크라 생각한다.
누구보다 높은 정신과 이상을 가졌지만 주변인물들도 안따라줬고 추구했던 이상도 허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실패했지만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후대의 사람들,
특히 후치는 드래곤라자, 퓨처워커, 그림자자국을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만큼 안타까운 사람도 몇 없을거야...
'나는 단수가 아니다.'
결국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다.
보통 나를 1인칭에서 관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예 그 시점을 바깥으로 옮겨버렸다.
~~하는 나, ~한 나를 내면에서 규정하는 게 자아를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시점인데,
이걸 '다른 사람들이 바라본 나'의 총합으로 생각했고 그렇기에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얼마 전 재개봉한 코코가 생각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나를 정의하는 건 나 개인의 주관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형성한
관계의 총합이 나이기에 나 개인의 개체가 죽어도 나는 관계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며 변화하고 부족함을 인정하며
그 부족함을 뛰어넘을 때 우리의 자아는 더욱 성장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인물간의 관계 묘사에 공을 기울인다.
네리아-운차이, 엑셀핸드-아프나이델, 후치-샌슨 등의 티키타카가 재밌게 다가오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단점이 없는 소설은 절대 아니다.
초기작이다보니 아무래도 문체가 좀 난잡하다.
연재판에서 좀 가다듬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찬가지.
특히 연출면에서는 올드한 느낌이 많이 난다.
98년작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기술명을 굳이 꼭 외치는 부분이라던가,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를 꼭 외치는 부분이라던가...
유머파트도 지금 보기에 나쁘진 않지만 썩 좋지도 않다.
거기에 연재판으로 넘어오면서 저작권 때문에 여러 명칭들이 변했는데
이건 결국 독자적인 세계관이 없었기 때문에 생겼던 문제 같다.
실제로 서양 / 일본 판타지를 그냥 한국말로 잘 풀어쓴 소설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는데,
진짜 개소리고 사실 판타지 중에 D&D나 반지의 제왕 영향 안받은 작품이 어디있겠나.
판타지라는 틀을 처음 확립한 작품이었고 톨킨의 상상력도 정말 말이 안되어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버렸고 이게 대부분의 소설들의 기반이 되어버렸으니
이 틀을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는 건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독창적인 세계관을 갖춘 소설들이 드물고 귀한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작에서 보이는 인물간의 대담에 세계관, 인물들의 가치관 등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스킬은 여기서부터 이미 완숙의 경지에 달해있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정통 판타지.
읽지 않은 사람이 드물겠지만 혹시라도 안읽었다면 이것부터 읽자.
판타지소설을 읽는 눈이 떠질 것이다.
별점 4.1 / 5.0
별점 기준
4.9 ~ 5.0 : 완벽에 가까움
4.6 ~ 4.8 : 올타임 레전드
4.1 ~ 4.5 : 인간계 최고수준, 명작
3.1 ~ 4.0 : 챙겨보면 좋을 소설, 수작
2.1 ~ 3.0 : 킬링타임으로는 그럭저럭 볼만한 소설
1.1 ~ 2.0 : 읽을수록 시간이 아까워지는 소설
0.1 ~ 1.0 : 종이가 아까운 소설, 무료 연재분만 보고도 충분히 거를만한 소설